송영춘목사님의 로뎀나무칼럼(2020.05.10)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효정 작성일20-05-10 13:02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아픈 사랑은 자비가 아니다.(자비의실제)
‘뭐 드시고 싶은 것 없어요?’ 나의 물음에 그저 고개를 가로젓는다.
‘다음 주에는 밖에 나가서 차라도 한 잔 하면 어때요’ 의지를 묻는 내 질문에 재차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몇 개월을 못 봐 수척해진 모습이 어색한 아버지는 내 물음에 그저 고개만을 가로저을 뿐 아무 말이 없다.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인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다음주에 다시 보자는 약속에 복지사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는 휠체어 뒷 모습이 갑자기 흐리게 보인다…
목사가 되고 나서 감사한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성도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다는 것과 내가 마음 먹으면 성찬을 베풀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의지 없이 그저 고개만 가로저을 뿐인 모습을 보며 ‘성찬을 베풀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새삼 손을 빌리지 않고 축복할 수 있게 하신 은혜가 감사했다.
돌아오는 차 창은 벌써 봄이 발 빠른 마라톤 주자 처럼 지나가 버리고 여름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었다. 그 어설픈 여름의 풍경이 조금 전 아버지의 뒷 모습을 볼 때 처럼 흐리게 보였다.
지난 주 말씀 중에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비’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자비’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그대로 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놓친 것이 있었다. 이웃이 원하는 것이 없을 때, 이웃 스스로가 필요한 것을 모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돌아와 곰곰히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자비’할 수 있는 것일까??
몸부림 치다시피 생각을 짜내는데도 도무지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 지혜를 구하고 또 구해도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시지 않는다.
더 신중하고 절실하게 구하라는 뜻일까??
또 다시 아버지의 뒷 모습을 볼 때 처럼 모든 것이 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 분명한 생각 하나가 내 머리를 파고들었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을 때’ 그 때 먼저 다가가 해줘야 하는 것이 ‘자비’라는 것을…
늦은 후회에 또 다시 세상이 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