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춘목사님의 로뎀나무칼럼(201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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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형종 목사 작성일19-12-15 13:4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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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오락 프로그램 치고는 상당히 유익하다 생각하는 tv프로그램이 있다. 다섯 명의 전문가들이 전국을 돌며 그 지역의 명소, 유적, 음식등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며칠 전의 방송에서 어느 지역인지, 전체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유독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있다. 조선의 과학자 ‘장영실’에 대해 나눈 출연자들의 대화가 그것이다. 장영실은 본래 부산 동래 관가의 관노였던 사람이다. 관노였던 장영실은 세종에 의해 발탁되고 많은 업적을 세워 벼슬에 까지 오른 인물이다. 출연자들의 말에 의하면 세종이 장영실에게 벼슬을 주고 싶어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했다고 한다. 의견을 취합한 신하들이 세종에게 ‘장수도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데 장영실이 세운 공을 보면 벼슬을 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세종에게 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한 출연자가 “아! 세종과 같은 성군 밑에는 현명한 신하들이 많았나 봅니다. 참.. 신하들도 깨어있었네요”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자 한때 보건 복지부 장관까지 지낸 한 출연자가 “현명한, 깨어있는 신하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왕의 마음을 아는 신하들이 있었던 거지요 왕이 장영실에게 벼슬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아니까 왕의 입맛에 맞춰서 명분을 준거지요 핫하하” 순간 내 입에서는 “아….” 아쉬움만 토해냈다.
신앙은 관점을 달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가지고 있던 관점이 신의 관점으로 나를 보게 되어 지는 것이다. 사람은 수양을 통해서나 교육을 통해서 이 관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유사하게 흉내는 낼 수 있겠으나..)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용하는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삶이 변화 되어지는 것이다. 신의 관점에서 나를 보게 되기에 부정적인 요소는 자제하게 되어지고, 긍정적인 요소만 남게 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내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내가 좋으면 그것이 곧 정의’라고 말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이 세상 어디엔가에서 그저 떨어진 존재가 아닌 한, 세월이 흐르다가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생겨난 산물이 아닌 한. 누군가에 의해 의도 된 존재이고 그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의도한 누군가에게, 만든 누군가에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부정했을 때 우리는 ‘누군가’를 부정하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만들어진 것에 대한 평가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되어진 일에 대한 평가의 관점은 다각도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의도와 목적’은 언제나 그 일의 주체만이 알 수 있다. ‘내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만들어진 것과 되어진 일의 주체가 가진 의도와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순간 질서는 무너질 것이고, 존중은 사라질 것이다.
성주(聖主)와 현신(賢臣)의 미담이 조정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왕과 그 왕의 빌붙는 간신배의 이야기로 전락하는 파괴력에 놀라는 순간이었다.
17년 12월 24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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