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춘목사님의 로뎀나무칼럼(20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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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형종 목사 작성일20-04-05 12:39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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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무언’이란 말이 있다. 입은 있으나 말이 없다는 말이다. 말이 없다는 것은 할 말이 없을 수도 있고 말할 필요를 못느끼기에 말이 없을 수도 있다. 또는 말이 미치는 파장을 염려해 절제하겠다는 의미로 쓰일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유구무언이고 싶으나, 유구무언이 안될 때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때는 뭔가 자기 변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껴질 때의 감정인 것 같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유구무언이 훨씬 좋은 결과는 가져온다. 이것은 나이가 들면서 가지는 지혜이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유구무언’ 입은 있으나 말이 없다.
‘열손가락을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란 말이 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모든 자녀가 다 똑같이 사랑스럽고, 귀하고, 보배로워서 그 분량이 다를 수 없다는 의미다. 사랑의 깊이가 아니라 사랑의 분량이다. 그러나 부모가 되어 보면 자녀에 대한 사랑의 분량이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째보다 막내가 더 애착이 가는 이유는, 막내는 그만큼 부모와 함께 살 수 있는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난 자식보다 못난 자식이 더 애착이 가는 이유는 잘난 자식은 스스로 알아서 잘 하겠지만, 못난 자식은 혼자서는 잘 할 수 없을 것 같은 염려와 애처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아니다, 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부모가 자식보다 세상을 먼저 뜨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에 당연히 묻혀야 할 산에 묻는 것이고 잠깐은 이별의 슬픔과 모자람의 아쉬움에 슬퍼할 수 있지만 오래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식의 경우는 부모보다 나중 온 자식이 부모보다 앞서 가버리면 납득할 수 없는 충격으로, 그리고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과 돌이킬 수 없는 한계의 무게에 평생을 두고 슬퍼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은 어느 순간 포기 할 수 있지만, 아니 체념 할 수 있지만 자녀를 살아서 잃어버린 부모는 평생을 두고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벌써 십수년째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잃은 자녀를 찾는 현수막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또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자신의 인생을 시간에 묻는다.
170730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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