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9)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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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0-12 10:41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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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묵 마태복음27:11-26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머릿속에 한 번 그려보자.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했다(1절). 이유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신성 모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로마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는 예수를 처형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 한다고 고발한다.
그러나 정작 빌라도는 예수가 자신의 통치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전혀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23-24절). 빌라도의 아내는 꿈에서 본 것을 증언하며 예수님께 해를 끼치지 말 것을 당부한다(19절). 이방인인 빌라도마저 분별을 하는데, 정작 율법을 아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은 탐욕에 눈이 가리워 본질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빌라도 앞에 재판을 받아 죽음으로써 로마의 손아귀에서 그저 무력한, 메시아가 아닌 신성모독자, 협작꾼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빌라도는 여러 번에 걸쳐 무죄로 보이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한다(17, 21-24절). 그러나 이미 탐욕에 젖어 악한 무리는 그저 예수를 죽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고 나선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22절) 가장 무서운 방법이다.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의미가 있다(신21:23). 수 차례에 걸친 빌라도의 회유에도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의 못박는다. 사망의 저주를 끊으려는 예수님. 오히려 그 저주를 자신들에게 돌리고 있는 무리들의 무지. 예수님은 끊으려 하시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끝까지 돌리려 한다.
그런데 빌라도의 심문에서 왜 예수님은 침묵하셨을까?(14절) 목적을 위한 확고한 의지가 있으셨기 때문이다(막10:33, 눅9:51). 그리고 용서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업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또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이 이 세상에 주려고 하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들의 무관심에 예수님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순종이다. 침묵은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이 집중에 사단도 개입의 여지가 없었다. 그 만큼 신중하고 엄중한 것이었다. 주님의 침묵은 위엄이었다.
다가올 주님의 부활은 기적이 아니다. 주님이 인간의 손에 맡겨진 것이 기적이다. 그리고 주님이 인간의 손에 죽으심이 기적이다. 그것도 가장 처참한 십자가를 택하심이 기적이다. 그 순간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침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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