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5)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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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tewardship 작성일19-05-11 22:4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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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사도행전 9장 1-20절
제목 : 감격시대
카리스마는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은사라는 의미를 가진 기독교적 단어였으나, 우리에게는 리더십, 권위 혹은 지배력 등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는 한 성령으로부터 받는 선물이며, 성령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그 종류를 들어 고전 12:8-11에서 말하고 있다(고전 12:31). 그리고 은사에 버금가는 것이 있다. 바로 ‘칭찬’이다. 그냥 넘어갈 법한 사소한 일도 상대가 힘과 자신감을 얻고 동기부여 하도록 북돋는 ‘칭찬’은 말뿐만 아니라 상대를 인정, 신뢰하는 행동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칭찬이 오늘 말씀의 전체를 아우르는 맥이다.
사울은 이방인의 도시에서 태어난 베냐민 지파에다가 율법을 준수하기로는 바리새파였으며, 자신은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빌 3:6).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에 대해 불손의 죄를 짓는 예수 그리스도파의 잔당을 처형하는 선봉이었다(행 26:9-12). 본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다메섹으로 피신한 그리스도인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일어난 일이다.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사울을 부르시고(3절), 사울은 놀라 엎드렸다. 그리고 눈이 멀게 된다. 여기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이다(10절). 그가 제자라 칭함을 받을 만큼 상당한 위치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아, 그리스도인들이 급작스럽게 퍼져나가기 전부터 예수님을 믿던 사람이라고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런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고 안수하라’고 말씀하신다(10절). 이에 아나니아는 사울이 어떤 존재인지 말하지만(13-14절),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말씀하시고(15절), 이에 아나니아는 사울에게로 떠난다.
먼저, 하나님은 언제부터 사울을 쓰려고 작정하셨을까. 그리고 사울은 왜 눈이 멀어야 했을까. 그 답은 갈 1:15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택하셨다. 이때,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선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반드시 그 계획을 실행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서만 자신을 평가하고 극복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순간, 이후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결국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아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이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만다. 사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고 하나님도 우리의 현실을 보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님의 형상만을 보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의 눈을 잠시 멀게 하셨는지 모른다. 네가 보고, 알고, 만질 수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오감은 보지 않을 때 더욱 발달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보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느끼려 하기 때문이다. 이제 눈을 감고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을 그저 느껴보자.
앞의 질문에 이어 한가지 의문점이 더 있다. 하나님은 왜 하시는 일에 사람을 쓰시냐는 것이다. 사울의 회심 사건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 아나니아를 쓰신 까닭은 뭘까. 먼저 아나니아의 순종을 생각할 수 있다. 13-14절에서 아나니아는 ‘할 수 없다’고 돌려 말하고 있지만, 15-16절 말씀에 즉각 순종한다. 더 나아가 원수 같은 존재였을 사울에게 ‘형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뜻만 전한다(17절). 마찬가지로 사울도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다가 불과 며칠 사이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는 변화를 하며 순종한다.
서두의 ‘칭찬’이 바로 이 두 사람이 보여준 순종의 이유이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에 자신이 도구로 쓰였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동기부여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사울은 눈이 멀었다가 아나니아를 통해 다시 뜨게 된 사건을 통해 나를 죽일 수도 있던 분이 나를 살려주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신뢰를 통해 그들은 순종의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도 원하시지만, 그보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원하신다. 19절에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며칠’ 머물렀다. 이제껏 혼자만 열심이었던 사울이 비로소 ‘우리’를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각자의 달란트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내가 힘들고 지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때 공동체의 형제자매를 통해 음성을 들려주신다. 우리 교회의 이적과 표적은 한가지 분명한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데, 바로 목자와 공동체의 중보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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