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16)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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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tewardship 작성일18-09-22 11:29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말씀 : 창세기 22장 9-12절
제목 : "질투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교훈이 가능한 말씀이다.
1. 순종이라는 관점. 뭐니 뭐니 아브라함 하면 순종을 우리는 먼저 떠 올린다. 아브라함의 순종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삭의 번제물 사건은 대표적이고 유명한 것은 물론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순종이기에 더욱 값지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2. 순종에 이은 다른 또 하나는, 우상이라는 관점이다. 우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많은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간단하게 두 가지만 알자. 1) 우리는 우상을 자연의 어떤 것을 조각하고, 그것에 신적인 의미(신적 의미라는 것은 내가 의지할 만한 가치를 인정한 것들을 말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 대용품들을 말한다)를 부여하는 것만으로 생각한다(그것도 맞다. 동네 어귀에 있던 성황당).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우상이란 ‘나를 위하여 만든 모든 것’이 우상이라고 말씀하신다(출 20:4). 2) 우상의 두 번째 의미는 내 마음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 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약속하셨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복을 주고 그 복을 통해 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해주시겠다는 약속하셨다. 약속의 시작으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신 일. 이 일에 아브라함은 순종한다. 우르를 떠난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보장되어 있는 ‘안전과 형통과 평안’한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외에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순종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대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신다. 바로 자녀에 대한 약속과, 땅에서 복에 대한 약속이 그것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약속에 오히려 더 큰 기대와 희망을 가지게 됐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낳는다.
3.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다 같이 22:12절의 말씀을 읽어보자.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내가 이제야” 이상하지 않은가? “이제야” 아브라함의 마음, 중심, 믿음을 아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중심을 정말 모르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가 아는 것만큼 안 되는 것? 성경의 주님의 말씀이 허풍이라는 것일까?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비밀에 부쳐두고, 다시 말하면 알려 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선택하는지를 두고 보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어느덧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아니 한번쯤 이라도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께 항변하거나 하나님과 결별을 선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어떤 의문이나, 거부감 없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브라함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아브라함을 믿고, 아브라함의 자유의사를 전적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법이다. 우리의 사랑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의 방법이다. 이 사랑이 바로 질투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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