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3월 1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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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형종 목사 작성일20-03-08 12:36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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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9장23절
참 그리스도인 2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날, 제자들을 모으고 만찬을 베푸셨다(마26:26-28). 그 자리에는 예수님이 신뢰하고 사랑하셨지만 결국 예수님을 은30에 파는 가롯유다도 함께였다. 예수님은 가롯유다가 자신을 대제사장에게 팔 것을 아시면서도 묵묵히 마지막을 준비하셨다. 33년간 주님의 생애를 결정짓는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제자를 자처하는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고 말씀하신다.
이번 주일 예배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회중이 모인 곳이 교회고, 회중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교회이다. 그리고 예배는 교회에서 회중과 함께 행해져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든 사단의 궤계든 간에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고, 가장 선한 결과로 열매 맺을 줄 아는 사람이다. 잠잠히 기도하며 겸손히 하나님만 바라볼 때이다.
오늘 말씀은 시리즈 설교임에도 불구하고 공교롭게도 현재 상황과 일치한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용도는 무엇인가? 십자가는 형틀이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죄의 대가로 죽음의 형벌을 치르는 수단이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죄의 대가로 죽어야 하는 형틀을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죽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정확히는 자신이 죽여야 할 것을 지고 따라가는 것이다. 엡4:22-24의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한 말씀에 빗대어 보면,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며 살았던 옛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지만 거룩함으로 지음 받는 새 사람이 생겨난다. 옛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즉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감정에 의한 교만, 탐심, 불의, 분노와 증오, 쾌락 등을 죽여야 한다. 이것들은 우리의 성품, 성질, 일부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형상과 전혀 맞지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부인하는 것일까? 가장 먼저, 이것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과, 이것들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성품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것들을 미워하고 혐오하며, 매일 한결같은 마음(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을 가져야 한다.
서두에 언급했던 ‘마지막 만찬’ 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붙잡히시자 세 번 부인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니 제 갈 길로 갔다. 이상하지않은가? 교회의 기초가 되는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제 갈 길로 갔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결국, 제 갈 길을 가려면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자기 부인은 자신을 보지 않고, 상황의 어려운 길을 보지 않고 주님만 보는 것이다. 앞서 가시는 주님을 꼭 붙잡고 바라볼 때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스데반 집사가 자신이 놓인 상황을 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니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처럼말이다(행7:56).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알려할 때, 우리의 십자가의 고통을 알지 못하게 된다. 십자가는 불행이 아니다. 모질고 고통스러운 인생길도 아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님과 우리가 하나 된다. 십자가의 고통이란 주님과 우리가 하나이기에 세상을 거부하는 데서 오는 저항의 고통이다. 그리고 주님과 우리가 하나이기에 날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세상의 도전에서 오는 고통이다. 주님과 우리가 하나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의 위협에서 오는 두려움의 고통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배신도 아셨고, 베드로와 제자들의 부인과
배신도 아셨다. 그러나 묵묵히 십자가를 지기 위해 주님의 길을 가셨다.
놀라운 것은 남겨지는 자들을 위해 축복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만찬에서 하신 주님의
약속이 새 언약이 되고,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약속이 되었다(마26:26-30). 골고다 언덕길을 묵묵히 가시는 주님이 오늘 세상의 어려움에 처해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지만 이것은 명령도, 권면도,
당부도 아니다. 선택이다. ‘만일’ 너의 마음이, ‘만일’ 너의
생각이, ‘만일’ 너의 각오가 나를 따르려거든….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로 했다면, 작정해야 한다.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