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1월 19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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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형종 목사 작성일20-01-26 13:1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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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2장20절
끝까지 따라 간다!
죽음의 위기에서 나의 생명을 지켜준 은인이 있다면 누구나 평생을 두고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품고 어떻게든 갚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 나보다는 남을 위한, 세상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믿음은 무엇인가? 무턱대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사실을 믿는 것인가? 이런 사실들을 믿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없다. 단지 사실을 아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귀신들도 알기 때문이다(약2:19). 그렇다면 ‘앎’을 넘어서 ‘믿음’은 무엇일까. 1.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 2.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죄 사함과 영생을 신뢰하는 것: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신 것과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함께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 즉, 사도들이 생명이 다하도록 포기하지 않고 선포했던 복음, 예수님이 나의 죗값을 대신해서 죄의 저주를 끊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우리는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1.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나도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한다. 기독교는 입술의 권세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입술의 권세를 믿고 증거하자. ‘주님이 저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저도 함께 죽었으니 주님이 부활의 영광을 입으실 때 저도 함께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2.세례로 믿음을 나타낸다. 세례는 단순히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안수를 받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귀의했다고 각인시키기 위해 치러지는 이벤트가 아니다.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연합이며,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함께 죽고 산다는 믿음의 고백의 현실화이다.
이제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 누구인지 알았고 고백했으니 그 분의 유업을 따라야 한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1.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의뢰한다. 세상의 능력이나 권세, 영향력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만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2.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것도 순종하고 충성한다. 예수님이 하셨던 ‘죽기까지 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따르는 것이다. 그 뜻이 어떤 길일지라도 변함없이 따라야 한다. 3.그리고 이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한다. 1번(하나님만 의지·의뢰)과 2번(하나님의 뜻에 순종·충성)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면 여기에 더해 이웃까지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 되어주셨다. 우리는 이처럼 생명의 은인까지는 못 된다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나눌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인데, 왜 우리가 따라야 하는 것들 것 전부 행위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행위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이요, 머리와 생각 속에만 있는 믿음이기 때문이다(약2:22). 그렇다면 어떤 행위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일까? 바로 성령에 따라 이끌림 받는 행위이다. 아무리 경건하고 거룩한 믿음이 있다 해도 행위로 증명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며, 행위로 드러난다 해도 성령에 거슬리는 행위면 그 또한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되 성령의 충만함을 따라 행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자(갈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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