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29)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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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tewardship 작성일19-10-06 00:1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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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누가복음 12:13-21
제목 :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우리 민족은 내 가족, 부모님 등을 말할 때 ‘우리’라는 수식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인연을 맺는 습관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이 공동체 형성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의 민족성이 가져오는 폐단으로 나와 다른 것을 틀리다고 하는 습성이 있다. 내가 속한 집단, 우리 공동체, 우리 교회가 무조건 맞는다고 하는 집단 이기주의로 번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나를 위해 계셔야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본문의 등장인물도 역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일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1) 13-15 : 유산 나누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관여, 2) 16-21 : 그것을 거절하신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다. 먼저, 첫 단락은 어떤 영문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13절에 등장한 사람이 유산을 나누는 데 있어 예수님이 개입(성경에는 명령이라고 나와있다) 하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눠주실 것을 바라고 있다. 무엇이 억울한지는 몰라도 유산을 나눈 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혹시 여기에서 우리 모습은 없을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찾은 이사람과 우리의 닮은 모습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 평가하지 않으신다. 그저 그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 뿐이다. 내가 그 일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의 억울한 이유가 재산 분배의 결과보다 근본적인 문제, 바로 탐심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탐심은 무엇일까. 필요 이상으로 가지려는 마음, 필요한 것을 이미 충분하게 가지고 있는데 계속해서 더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고 집중하는 마음, 많이 쌓아두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의 탐심의 의미이다. 탐심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를 우상숭배라고 말씀한다(엡 5:5).
다음 단락인 비유의 말씀을 보자.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가지고 있는 창고가 모자랄 정도로 소출이 많아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지어야 하는 것으로 보아 그 해 풍년이 든 것 같다. 그의 탐심을 알 수 있는 것은 1. 이미 더 큰 창고가 필요할 정도로 소유의 넉넉함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이미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소유를 더 많게 하기 위해 창고를 크게 지으려 한다. 2.17,18절-내 곡식, 18절-내 곡간, 19절-내 영혼 이렇듯 모든 말의 중심에 “나”와 “내”가 있다. 그의 생각에는 “하나님과 너와 이웃”은 없다. 이는 재산 소유의 목적과 축적의 목적이 오직 자기 자신에만 있다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나만을 위해 내가 즐거워하는 것. 앞에서 보았던 탐심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이 부자의 탐심 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잘못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탐심이 우상숭배이니 잘못이고, 죄인 것은 맞다.) 어찌 보면 이 부자는 열심히 노력했기에 소출이 풍성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잘 때 일어나 일했을지도 모른다. 몇 곱절의 노력의 결과로 창고를 크게 지어야만 하는 소출을 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그를 나쁘다, 게으르다 하지 않으시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다(20절).
예수님이 어리석다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열심으로 수확하고 쌓아둔 재물을 정작 ‘너’는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오늘 밤 ‘네’ 생명을 하나님이 거두어가시기 때문이다. 열심으로 쌓아둔 재물이 ‘네’ 생명이 거둬지고 나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뜻이다. 자신의 몫의 유산을 챙기기 위해 예수님을 개입시켜 예수님의 능력을 쓰려 했던 사람. 열심히 일하고 얻은 열매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누리지도 못하고 죽게 된 비유 속 부자. 이들의 공통점은 탐욕이다. 필요 이상으로 가지려는 것도 탐욕이지만, 유산의 불만에 눈이 어두워져 예수님의 오신 이유를 모르는 것은 영적 탐욕이다. 또한 이유를 모르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것 역시 영적 탐욕이다. 열심히는 살지만 자기애에 빠져 하나님을 모르고 그의 뜻을 않는 것, 영적 탐욕이다.
우리가 잘 아는 가롯 유다는 누구보다도 열심인 제자였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어느날 그가 꿈꾸던 독립을 이뤄줄 사람이 나타나, 열심으로 섬겼지만 나타난 ‘그’가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자신이 꿈꾸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정말과 배신감에 ‘그’를 죽이겠다는 제사장들에게 팔았다. “다 이루었다”는 말을 남기며 죽은 ‘그’를 보며 유다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유다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인가? 아니다. 사단이 해야 할 일을 자진해서 한 것이다. 오늘 나왔던 예시는 모두 영적 탐욕의 결과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권면하신다. 이제 나를 믿으니 나만 믿고 따르라. 영적 탐심을 버리고 나만 보고 따르라.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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