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2월 16일 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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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3-24 10:1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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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9절-21절
‘자비와 공의의 두 가지 모습’
사랑이란?
본문에 의하면
‘원수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마음으로 축복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줌으로써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더 잘해주라’
는 의미도 담겨져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
1)원수를 사랑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마5:45), (시103:10), (엡4:32)
그리스도인은 삶을 통해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2)하나님의 뜻을(성품을) 실천할 때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만족감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히10:34)
3)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반드시 원수를 갚으시기 때문이다. (롬12:19)
4)하나님은 자비하시지만 동시에 공의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축복할 권리만 주셨다.
남을 저주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벌하실 때까지 참고 견디며 기다려야 하는가??
성경에서는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이드 라인이 있다.
1)성경에서는 일한 자는 삯을 받을 자격이 있고 게으른 자는 그렇지 않다고 가르친다.
즉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을 몇번이고 참아 줄 수는 있지만 일하지 않고 임금을 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어기는 것이 된다.(살후3:10-12)
예수님과 바울이 선을 베풀라고 말씀하는 말의 의미 속에는 적정한 가치를 지불하고 물건을 얻어야 한다는 것과
정당하게 일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근본적인 질서를 선행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근본적인 질서를 어기면서, 근본적인 경제 원리를 어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질서대로 하지 않으면 도둑질이 되는 것이다.
2)성경은 권세자들이 잘못한 사람들을 벌할 권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롬13:2), (롬13:4)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권세자로 임명된 사람들에게 그 권리를 나누어 주신 것이다.(이 것을 질서의 문제이다.)
3)성경은 교회가 고의적이고 지속적으로 죄를 저지르는 성도를 징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전5:4-5), (살후3:14)
교회가 징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에는 그 사람을 구원하려는 의도에서 그를 거부하고 모질게 대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세가지의 예를 보면 12: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는 행동 양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가지의 가르침의 요지는 ‘그들이 받을 자격대로 대하라’이다.
이 것이 공의이다. 자비도 있지만 공의 역시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가지의 가르침은 인간의 제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사업, 국가, 교회의 제도에 관한 것이다.
이 제도들은 피조물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들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들에는 정의라는 기반이 있다.
즉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들에는 정의의 관점에서 관계를 맺는 것들이다.
자비로써 맺어진 관계도 존재하지만 정의의 규칙,,
즉 공정한 보상의 규칙에 모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모든 것 역시 질서라는 근본 개념을 가지고 형성된다는 것이다.
벌할 일은 벌하고 상줄 일은 상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정의의 규칙이 존재할 때 비로서 기본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제도를 만드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에서 이런 제도를 대표하는 일을 맡았다면 공의의 관점에서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시다.
공의의 제도가 있을 때 비로소 자비의 제도 역시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벌하지 않으면 용서를 알 수 없다. 배려가 반복되는 권리인줄 안다.)
자비와 공의 모두 같은 동기여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비와 공의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명령에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마음에서 자비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또한 세상 질서 속에서 공의의 모습을 보여야 할 때 역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마음에서 공의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즉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를 어려운 사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그 어려운 사명 역시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죄의 무게에서 오는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런 죄책감 속에서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위선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공의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모습인 참소와 정죄의 모습을 취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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